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어떤 학교에 다닐지, 어떤 친구를 사귈지, 어디로 이사를 할지, 어느 회사에 취직할지, 어떤 배우자를 만날지, 어느 곳에 투자할지, 어떤 종교를 가질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은 자유의 상징이자 인간의 특권이지만, 무한히 보장된 선택권은 오히려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모든 선택에는 그에 따른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좋지만, 그 결과는 온전히 내 책임이라는 게 버겁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시인이 있습니다. 냉엄한 생활 세계로부터 애잔한 서정 세계를 발견해내는 김광규 시인입니다. 그는 ‘대장간의 유혹’이라는 시에서 획일화된 선택을 강요하는 현대사회를 성찰하고 있습니다.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시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정답이 있는 곳입니다. 선택지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부모님이, 어른들이, 선배들이, 기성세대가 네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저기라고 이구동성으로 알려줍니다. 어떤 길을 가야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물건처럼 생겼습니다. 개성은 존중되지 않습니다. 수공예품이 아니니 망가지면 내다 버리면 그만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 그 같은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당장이라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버스는 정해진 길만 따라가는 문명 세계의 상징입니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조선의 천재 화가 김홍도의 그림 ‘대장간’을 보신 적 있나요? 풀무질하는 소년 아래로 대장장이들이 벌겋게 달궈진 쇳덩이를 쇠메로 내리치며 메질하는 풍경이 담긴 그림입니다. 모루 위에 놓인 쇳덩이는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호미, 낫, 괭이 등 농기구로 만들어집니다. 홍은동 사거리에 대장간의 맥을 이어온 털보네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시인은 그곳에 종종 들러 물건도 사고 구경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장간이 사라졌습니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현대 아파트는 새로운 문명이고, 털보네 대장간은 사라진 문명입니다. 대장간에서 만든 물건 대신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플라스틱 물건이 유용한 시대이니 대장간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은 대장간을 그리워합니다. 오랜 풀무질과 메질로 단련된 개성 넘치는 시퍼런 무쇠 낫이나 꼬부랑 호미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대장간 벽에 줄지어 걸린 물건들은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기에 모양새가 조금씩 다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규격화된 플라스틱 제품과는 다릅니다. 차별이나 개성 없이 똑같이 만들어진 플라스틱 제품처럼 되기를 거부하며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나만의 품격과 이야기가 담긴 소박한 수공예품이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직지사(直指寺)는 경북 김천에 있는 천년고찰입니다. 해우소(解憂所)란 사찰에 딸린 화장실을 가리킵니다. ‘근심을 풀어주는 곳’이란 뜻이죠. 요즘은 해우소도 대부분 수세식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예전의 재래식 화장실이 남아 있는 사찰이 있습니다. 직지사 해우소는 그중에서도 유명했나 봅니다. 화장실 깊이가 아주 깊었던 거죠. 자칫 발을 헛디뎌 빠졌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죠. 시인은 자신의 삶이 너무 부끄러워 직지사 해우소에서 볼일을 볼 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면 시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고 하네요. 어디일까요? 털보네 대장간 벽입니다. 복 ! 된 듯한 삶이 아닌 나만의 개성이 넘치는 삶, 안전하게 누구나 가는 길을 무작정 따라가는 삶이 아닌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길을 홀로 걸어가는 삶을 살고 싶은 겁니다.
흔히 행동이나 태도를 정해야 할 때 망설이기만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결정장애(Indecisiveness)라고 합니다. 선택 장애라고도 하죠. 물론 의학 용어나 정식 병명은 아닙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이런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생겨난 신조어입니다. 여러 선택지를 놓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뒤로 미루거나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맡겨버리는 습관을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이라고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지 다른 길을 택할지 고민하며 이런 독백을 내뱉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바로 이 대사에서 착안한 용어입니다. 결정장애라는 말보다는 좀 순화된 느낌이지만, 뜻은 매한가지입니다.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유부단은 마치 병처럼 보입니다.
내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상황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내 행복을 위해, 내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매번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남편과 아내도, 친구나 지인도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나 외에 그 누구도 내 선택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주체성 있는 삶이란 지금 내 삶의 시간과 자리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겁니다. 자신의 선택에 당당한 겁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게 자존감 있는 인생입니다. 너무 최선의 것만을 선택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살다 보면 잘못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려면 자신만의 기준점이 ! 확한 게 좋습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머뭇거리다 보면 좋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선택의 폭을 줄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남들이 하는 공부하고, 가는 학교 가고, 적당한 때 짝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며 아등바등하느라 아까운 청춘 다 보내는 듯 보이는 인생도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면서 행복을 느끼며 산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삶입니다.
물론 대장간에서 이글거리는 불 속을 통과해 모루 위에서 벼리고 벼린 존재로 태어난 시퍼런 무쇠 낫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남들이 가지 않은 험난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생 역시 고결하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개성 넘치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는 거니까요.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안정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 때문에 오히려 힘들고 괴롭다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느라 고단하고 힘들어 포기하거나 되돌아가고 싶다면 어떨까요? 남들이 아무리 부러워하거나 박수를 보내도 정작 본인은 만족도 행복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길을 가든, 어떤 인생을 살든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입니다. 내 앞에 놓은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내가 선택한 것에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풀무질과 메질을 통과의례로 받아들이며 산다면 그것이 바로 주체성과 자존감 있는 인생이 아닐까요?
[출처 : 정신의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