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송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고등학교 2학년 정인이 어머니는 어느 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정인이 팔목에 자해한 것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으니 살펴봐 달라고 하시며 병원 치료를 권하십니다. 정인이 어머니는 너무 놀라 가슴이 뛰고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선생님은 통화 끝 무렵에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자해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하지 못하도록 교육하겠습니다.’고 하십니다. 어머니는 전화를 끊고 나서 정인이가 집에 올 시간이 되자, 아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지 못하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정인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따라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떻게 자해를 또 할 수가 있니? 담임 선생님께서 전화하셨다. 힘들면 이야기하라고 했잖아. 엄마는 네가 이제는 괜찮아진 줄 알았어.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나도 힘들어. 학교에서도 내가 무슨 큰 죄지은 것처럼 대했어. 그러니까 뭐라고 하지 마!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을 해야 엄마가 어떻게 해주지. 왜 엄마한테 성질을 내니? 뭘 잘했다고."
결국 정인이와 어머니는 서로에게 화를 내는 상황이 되었고 아버지가 대화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다음 날 둘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정인이는 3개월 전부터 우울함, 자해 때문에 저에게 진료를 받기 시작하였던 터였습니다.
“아이가 우울하다는 진단을 받은 뒤, 저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정인이가 더 이상 스트레스받지 않게 대학에 안 가도 된다고도 이야기했고 매일 안아주고 격려해주었어요. 집에서는 괜찮아 보여서 마음을 놓았는데 어제 담임 선생님께 받는 전화는 충격이었어요. 그동안 상담하고 치료한 게 아무 소용이 없는 걸까요? 우리가 아이를 과연 도와줄 수 있을까요?”
내 몸처럼 아끼는 자녀가 자해를 했을 때, 어머니가 느끼는 참담한 감정이 저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정인이 어머니에게는 자해 자체에 대한 실망감과 충격, 아이를 충분히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아 느끼는 미안함,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은 서운함 등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습니다.
진료실에서 본 정인이도 마음이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엄마, 아빠한테 너무 죄송해요. 저 때문에 부모님이 힘들어지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너무 싫어요. 이제 학교 선생님도 저를 안 좋게 보실 것 같아요.”
“무언가 하려고 해도 실천 못하고, 불안해하고 나약한 제 자신이 싫어요. 참아내야 하는 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요.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인데 결국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 그냥 사라지고 싶어요.”
정인이와 어머니가 서로를 걱정하고 위하고 있음에도 같이 감정을 나누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우선 정인이와 어머니께 감정이 고조되었으므로 서로 한 발짝씩 물러나 바라보길 권하였습니다. 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쉽기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정인이가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에 힘든 것은 이해하지만, 부모가 학습에 대해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우울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고 도움을 주려고 해도 정인이가 안 받아들인다고 여기셨습니다. 정인이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 애써주시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자신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야만 할 것 같아 부담스러웠습니다. 또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신이 무능력한 것 때문이라 여겨져 괴롭고 수치스러워 어머니에게 감정을 이야기하기 힘들었습니다.
정인이와 어머니가 서로에게 편안하지 못한 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인정(validation)이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인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감정적 고통을 느끼고 있고 그때마다 어머니가 직접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정인이 입장에서 공감해주고 기다려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서로의 인정이 필요하였습니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것은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인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 정인이의 가능성을 알기 위해 정인이의 특성을 이해하고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가장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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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픽사베이 |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정인이는 모범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아이입니다. 어른들의 말씀을 어겨본 적도 없고 친구들과 다퉈 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인이 스스로는 늘 자신을 비판하고, 실수를 질책하며 감정 동요가 생기면 쉽게 무기력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늘 말이나 행동을 하고 주변 사람들 반응을 살펴요. 행여나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되어서요.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려워요.”
“중학교까지는 성적이 잘 나왔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요. 그동안은 운이 좋아서 성적이 잘 나온 거였어요.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 저는 한 번 불안해지면 스스로 진정이 안 되어요. 혼자서 참아내야 하는데 이런 것도 못 참아내는 게 화가 나요.”
“이제 곧 중간고사인데 노력은 하지 않고 불안해하기만 하는 내가 너무 싫어요.”
정인이는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 내적으로 고통을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 정서를 다루는 방법이 많지 않아 현재는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감정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알아간다면 충분히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 커진다면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신중히 상황에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정인이의 긍정적인 삶을 위해 어머니가 먼저 다가가실 것을 권하였습니다. 정인이와 어머니가 갈등이 생길 것을 염려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지나가면 감정이 표현되지 않은 채 사이가 멀어지고,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어머니가 정인이에게 알려주기 힘들어집니다. 정인이는 현재 자신의 감정을 혼란스러워하고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차분한 태도로 정인이와 대화를 시작하여 감정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어머니에게는 불안을 견디고 자신의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고되고 지루한 일일 것입니다. 급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주변에서 자해를 의지의 문제로 보거나 한 때 지나가는 현상으로 치부해버리더라도, 정인이가 어머니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문제가 진심으로, 정중히 다루어지는 걸 경험하여 차차 자해 행동을 줄여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송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kacappos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