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중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면 반가운 얼굴도 있지만, 껄끄러운 얼굴도 있다. 즐거운 추억과 함께 씁쓸한 기억도 공유하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야, 걔 말이야. 이번에 개발한 제품이 대박 나서 돈 엄청나게 벌었다던데?”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도 막아야 한다면서 돈 빌리러 다녔었는데…….”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지지리 못하던 애 아냐?”
“운이 좋았나 보지 뭐. 언제까지 갈지 두고 봐야 아는 거야.”
성공한 친구 이야기가 나오면 격려와 덕담이 오가기보다는 비난과 험담이 난무하기 일쑤다.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어렵사리 성공한 사람일수록 옛 친구들로부터 인신공격을 당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지금도 유효하다. 관계없는 사람들은 축하를 보내는데,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더 냉정하다. 회사 내에서도 이런 사례는 빈번하다.
어부들이 그물을 이용해 게를 잡으면 뚜껑 없는 양동이에 집어던진다. 커다란 발로 기어 나와 도망가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지만, 가만 지켜보면 그게 기우였음을 알게 된다. 탈출하려고 기어오르는 게가 있으면 다른 게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아래에서 잡아당긴다. 탈출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맨 위에 있던 게가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다음 게가 기어오르면 아래 있던 게가 다시 끌어당긴다. 수없이 이런 광경이 반복된다. 한 마리도 양동이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없다. 이런 생리를 잘 아는 어부들은 안심하고 양동이에 게를 집어던지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크랩 멘탈리티(Crab Mentality) 효과라고 한다. 서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쉽사리 양동이 밖으로 나와 자신들이 살던 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나가겠다고 혹은 네가 혼자 탈출하는 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이를 제지하고 방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면 다 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공생하느니 공멸이 낫다는 심리다. 『이솝우화』를 읽는 기분으로 이 상황을 바라본다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으나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웃을 수만은 없다. 남이 나보다 잘되는 꼴을 볼 수 없는 옹졸한 마음, 내가 할 수 없는 걸 네가 하는 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치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더 삭막해질 것이다.
“그게 네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냐. 꿈 깨고 빨리 제자리로 돌아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거야.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야.”
“지난번에는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라고.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
“나도 하지 못한 일을 네가 한다고? 야, 웃기지 마. 불가능한 일이야.”
힘들게 노력하던 일이 성과를 거두려고 할 때, 뭔가 좀 의욕을 가지고 해보려고 할 때 주변에 이런 식으로 토를 달거나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내 인생의 ‘게’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한다. 서글픈 일이지만, 게는 내 인생길 여기저기에 수없이 포진해 있다.
나를 끌어내리는 게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성공이 그 사람의 평가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건 내 성취 과정을 객관적으로 지켜보고 판단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항상 만만하게 보던 타인의 성공이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자신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뒤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하거나 타인을 깎아내리려 하는 언사를 전해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빠져들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성공했고 그와는 관계없는 위치에 있다. 논쟁을 벌이거나 반박하면 관계만 나빠진다. 그 게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는 언제나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다. 그는 내가 날개를 달고 꿈과 이상을 쫓아 날아오르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를 말로 설득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 말에 주눅 드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현명하다.
주변에 온통 게들이 득실거린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차츰 게들이 살지 않는 다른 환경으로 내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내 삶의 환경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며 준비하는 사람, 매일 자신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동료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 다른 사람의 성공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좋다.
내가 게와 같은 존재일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힘든 일이다. 누군가 말해줘도 이를 인정하기 어렵다. 애정을 가지고 잘되라고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뿐 그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낌없는 충고와 조언이 바로 상대방을 잡아당기는 게의 역할이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그가 분수를 깨닫고 주제넘지 않게 살아가도록 이야기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게 역할의 시작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가정, 학교, 회사 등 크고 작은 조직의 일원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하며 살 수는 없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상호관계 속에 살아가는 게 상식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성취에 진심 어린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다른 사람의 고통과 눈물에 마음 깊이 위로와 공감을 표하는 것이 공동체 정신이다. 자신이 건넨 격려와 박수, 위로와 공감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내가 공동체 안에서 늘 게와 같은 존재로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 역시 결정적 순간에 내 뒷다리를 잡아끌어 곤두박질치도록 훼방꾼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원리다.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던 사람이 큰 성취를 맛보며 나보다 앞서가고 있는가?
“축하해. 정말 멋져. 난 네가 이렇게 잘 해낼 줄 알았어. 앞으로 더 잘될 거야.”
활짝 웃으며 이렇게 격려해 주는 건 어떨까? 양동이를 먼저 벗어난 그가 손을 내밀어 나 역시 양동이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둘 다 바다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을 이루었지만, 주변 사람이 험담하며 나를 끌어내리고 있는가?
“그래, 나 많이 부족해. 하지만 정말 열심히 했어. 너도 언젠가 좋은 날이 오리라 믿어.”
기쁘지는 않지만, 시원하게 이렇게 말해주는 건 어떨까? 자격지심에 게 역할을 하고 있을망정 그도 바다가 그리운 내 친구였으니 말이다. 언젠가 바다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출처 : 정신의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