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과는 아주 어색한 순간을 우아한 선물로 바꾼다.
_ 마가렛 리 런벡
아이와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 순간, 아이는 친구가 자기가 놀던 장난감을 뺏어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장난감이 자신의 머리에 떨어져 아프게 했는데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장난감만 가지고 달아났다면서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던 저에게까지 당시 아이의 속상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친구는 아직 어리지만, 분명 그러한 행동이 잘못됐다는 점과 실수로라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친구를 아프게 했을 때는 사과해야 한다는 점을 앞으로 배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아이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잘못해서 상대의 마음을 언짢게 하거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주었거나 혹은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는지 말입니다. 당시에 나는 과연 진심으로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의 말을 건넸던가,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사과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나의 실수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간혹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는 행위라든가, 스스로를 패배자로 인식하는 것, 잘못한 행위에 수반하는 책임질 일이 부담스럽다거나, 사과한 이후에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기꺼이 사과하기를 주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과의 행위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감을 더 두텁게 하기도 합니다.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한 사람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책임지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지요. 진심 어린 사과는 단지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상대에게 정중하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상황을 긍정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억울함만 토로하거나 성의 없이 형식적으로 하는 사과는 상대방의 마음을 언짢게 하거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해 ‘미안하긴 하지만….’과 같이 어설픈 변명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상대에게 물질적인 혹은 정신적인 손해를 크게 끼쳤다면 이에 대해 기꺼이 책임지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또 다시는 그러한 잘못으로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재발 방지에 대한 다짐과 약속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사과를 할 때는 적절한 타이밍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든 말에는 적당한 때와 알맞은 순간이 있습니다. 사과는 늦어질수록 하려는 사람도 어려워지고, 그 효과도 반감됩니다. 따라서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 늦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섣부른 사과나 강요된 사과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미시간대학교의 심리학과 크랙 스미스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실험 결과 ‘강요된 사과’를 받은 아이들은 “기분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안 좋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사과’를 했을 때 사과를 하는 입장에서도,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도 효과가 가장 좋게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에게 사과에 대한 태도를 가르칠 때는, 왜 사과해야 하는지, 상대방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생각하고 느낄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사과를 강요받거나 부모님에게 혼나지 않기 위한 면피용으로 해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사과를 해야 하는 아이나, 사과를 받아야 하는 아이에게도 ‘기다려 주는 자세’를 허용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만약 진심 어린 사과에도 상대방이 받아 주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감정이 누그러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할 때 사과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감정이 다치는 일 없이 존중받으면서 화해의 길로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친구의 무례한 행동에 마음이 상한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 줘야 좋을지 몰라 고민에 빠져 있던 저는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친구가 다음번에 또 같은 행동으로 너를 불편하게 하고 그때도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친구의 행동으로 인해 네가 왜 기분이 나쁜지, 얼마나 속상한지 꼭 설명해 주렴. 그래서 친구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사과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는 건 어떨까?”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좋아!”라고 대답하더니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이의 친구가 머지않은 시기에 사과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지금 누군가에게 사과하기를 거절한다면,
이 순간은 언젠가 당신이 용서를 구해야 할 때로 기억될 것이다.
_ 토바베타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